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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문일답] 레전드 박신자 '생애 최고의 순간은 세계선수권 MVP'
홍성욱 | 2015.07.07 08:45


[스포츠타임스=속초, 홍성욱 기자] 7월 더위가 한창인 속초 실내체육관. 냉방을 가동했지만 선수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뜨거웠다.

힘찬 박수와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오는 관중석 중앙에는 한국 여자농구의 전설 박신자 여사가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딴 2015 우리은행 박신자컵 서머리그 개막경기인 신한은행과 KB스타즈의 경기에 앞서 시구를 마친 그는 경기 후 기자들을 만났다. 백발이 자연스러웠고, 예리한 눈빛과 거침없는 언변에선 희수(喜壽)를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했다.

박신자컵이 탄생했습니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기쁘죠. 어떤 운동선수도 같은 기분일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살아있는 동안에 운동선수 이름을 따서 대회를 한다는 것은 지금 제 나이에서는 보너스라고 생각합니다.”

1964년과 1967년 세계선수권대회 때 기억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항상 운이 꽤 좋은 선수라고 지금까지 생각합니다. 물론 한국이 서구 팀에 비해 키가 작았지요. 그렇지만 한 가지 유리했던 건 서구 선수들이 우리 같이 체격이 작은 선수들의 조직적으로 빨리 움직이는 농구를 처음 보니 당황했던 사실이예요. 우리는 슈터들이 많았죠. 당시 3점슛이 없었을 때인데도 많은 선수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기억납니다. 상대 코치도 그런 경기를 하는 팀을 본적이 없었지요. 3년에서 5년쯤 걸려 한국을 2~3차례 볼 때까지는 그랬죠. 우리 기술을 노출할 기회가 없었기에 유리한 점이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여건이 좋아져 요리사도 동행하지만 그 때는 깡통 김치를 싸들고 페루까지 갔고, 체코슬로바키아까지 가고 그랬어요. 하지만 배고픈 사람들이 권투를 잘했듯이 세계로 향해 간다는 것, 비행기를 탄다는 것 자체가 대박이었어요. 코치 선생님들이 잘 가르쳐주셨죠. 상대가 골밑 위주의 플레이를 했다면 우리는 조직력과 작전으로 밀고나가는 경기를 했어요. 지금처럼 여러 스포츠를 구경할 것이 많지 않았던 시대라 즐길 수 있는 것이 한정됐던 시대였고, 우리가 이기는 종목이 많지 않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선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1967년이죠. 체코에서 시합을 한 뒤,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독일로 빠져나왔어요. 전체 2위를 했죠. 당시 북한은 체코에 영사관이 있었고, 우리는 그냥 간 상황이라 분위기가 험악했어요. 48시간 안에 (국경 밖으로)나가지 않으면 추방당할 수 있다고 해서 부랴부랴 나왔습니다. 독일을 거쳐 프랑스 파리까지 왔을 때 대회 MVP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좋았습니다. ‘내가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뤄서 농구의 피크까지 왔구나.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구나. 지금 관둬도 후회가 없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999년에는 세계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웃음을 보이며)생각해보니 그 때도 굉장히 좋았네요. 88 서울올림픽 농구 담당관을 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운동을 잘한 선수로 알고 있는 걸 알게 됐어요. 이후 미국에서 세계 여자 농구 명예의 전당을 만들면서 처음 19명에 들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부분이 미국 선수와 미국 지도자였고요. 저와 소련 선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나이 27에 은퇴를 했습니다. 이른 감이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당시 22살이면 올드미스로 불리던 시절입니다. 25살이면 정말 시집가기 힘들었어요. 저는 농구가 좋아서 27살까지 했습니다. 세계대회 마치고 대학원생 신분이라 마지막으로 도쿄 유니버시아드 금메달까지 하고 마쳤습니다. 늦게 까지 한 거였죠.”

당시에 카퍼레이드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김포국제공항에 내리면 해병대 지프차가 대기하고 있었죠. 제 이름이 앞유리에 붙어 있는 차에 올라 여름이건 겨울이건 바를 잡고 김포에서 상업은행 본점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했죠. 1961년 대한민국이 일본에 가서 전승을 하고 온 것을 우리 국민들이 봤을 때 열광했습니다. 제가 농구를 시작한 것이 1953년이었어요. 그 때 팬레터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원수를 갚아줘서 고맙다는 내용도 기억이 납니다.”

청와대에 초대도 여러 번 받았죠. 이승만 대통령 때 부터죠. 55년 홍콩원정 전승을 했을 때였고요. 이후 박정희 대통령 때도 그랬습니다. 그 때 박정희 장군배라고 해서 일본 대만 등 7~8팀 가까이 모여 치른 국제대회가 있었어요. 우승하고 불고기 먹으러 청와대에 갔었습니다. 당시 선수들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었죠.”

박신자컵에 나선 까마득한 후배들의 경기를 지켜본 소감이 궁금합니다.

국제 대회에 나가서 순위에 들 만큼 세련된 기술이나 능력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빨리 움직이는 모습이 좋았고, 선수들이 체력과 기술을 계속 연마한다면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운동은 기본기 없이 안됩니다. 지금 젊은 선수들도 기본기를 다지고 체력을 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선수가 성적을 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여자농구가 쇠태하는 느낌입니다. 1967년 세계선수권 2위 이후 1984년 공산권이 불참한 LA 올림픽에서 은메달, 이후 2000년 시드니올림픽 4위를 끝으로 이렇다 할 성적이 없다. 원인을 어떻게 보십니까.

저변확대가 필요하고 선수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1960년대에 중고등학교에 남자나 여자 팀이 많았습니다. 70년대 80년대를 거치면서 여자는 점점 줄어듭니다. 남자는 연대와 고대가 있고, 인기가 많으니 젊은 선수들이 선호했지요. 반면 여자는 대학팀이 없다보니 저변이 줄었습니다. 그게 큰 문제였죠. 협회에서 일을 할 때에도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걸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다보니 제 이름으로 프로모션을 할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라도 저변이 넓어진다면 저에게는 너무도 기쁜 일입니다.”

- 신용보증기금 감독을 하셨습니다.

감독을 맡으라고 했을 때 기뻤어요. 여자팀은 여자가 맡아보는 게 좋겠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저도 나름 운동을 했고, 학교도 다녔습니다. 어시스턴트 코치도 여자 후배들로 꾸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운동을 할 때와의 조건이 달랐어요. 코치만 잘해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드래프트에서 탈락한 선수들로 이뤄지다 보니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 때 느낀 건 스타플레이어가 반드시 좋은 지도자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인이 못해보지 않았기에 못하는 선수를 잘 가르칠 줄 모르는 거죠.”

2의 박신자를 꿈꾸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무한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누구도 2의 아무개가 되고 싶지는 않을겁니다. 제 경험으로는 농구가 그냥 좋았어요. 많은 분들이 제가 키가 크고 소질이 있어서 잘한 것으로 알지만 저 개인이 생각한 것은 나는 우리 팀의 어떤 선수보다도 연습을 제일 많이 했다는 사실입니다. 왼손잡이 선수가 왼손으로 훅슛을 하면 그 선수 왼편에서 그걸 항상 쫓아했고, 빠른 선수가 있으면 투맨패스를 하면서 속도를 끌어올렸습니다다.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성장한거죠. 동료 선수가 슛 연습 300개를 하면 1개라도 더 하고 마쳤습니다. 500개를 해도 마찬가지였고요. 로드웍도 많이 했고요. 좋다는 건 다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사람 사는데 중요한 건 가지고 있는 소질보다는 노력이더라고요.”

기억나는 후배 선수가 있습니까.

최근 10년은 한국농구를 잘 못봤어요. 앞으로 좀 열심히 보겠습니다. 제 경우 한 자리에서 슛만 잘하는 선수가 제일 쉬운 선수라고 판단합니다. 농구의 재미는 페이크와 어시스트입니다. 득점하는 것이나 스타플레이어가 되는 것보다 전반적인 농구 기술. 특히 올코트에서 할 수 있는 기술을 전반적으로 다 잘해야 합니다. 전주원이 가드로 어시스트를 꽤 잘한 것 같고요. 조카인 ()정은이도 잘했다고 해야겠지만 제 생각엔 아닌 것 같네요(웃음).”

상업은행 시절 3(三寶)시대의 주역들과는 연락을 하고 계십니까.

김명자는 하와이에 살고요. 김추자는 LA에 살고 있어요. 가끔 연락합니다. 잘 산다기보다 아직 살아있죠. 부고는 받지 못했으니까요(함박웃음).”

건강관리 비결이 있습니까.

마음을 비우는 것이죠. 저는 무리해서 운동을 안해요. 그렇지만 항상 걷고, 태극권을 미국 노인정에서 배워서 하고 있어요.”

박신자 여사는 국가대표 선수들과 U19 대표선수들이 도열한 사이로 하이파이를 나누며 플로어 중앙으로 입장했다. 현역 시절 해보지 못한 경험이라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였다. 2년 후배인 방열 대한농구협회 회장을 비롯한 농구인들을 많이 만나 기쁘다고 했다. 선수 시절 심판이나 기록원과도 대화하며 추억을 떠올렸다.

그는 8일 숙명여고 선배이자 농구 원로인 윤덕주 여사의 10주기를 맞아 경남 통영 선영을 찾은 뒤, 9일 미국 뉴욕으로 돌아간다.


홍성욱 기자 mark@thesportstimes.co.kr

[사진=레전드 박신자 여사. WKBL] 

홍성욱  mark@thesports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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