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단독코너 ST피플
[ST피플] 이형택, '큰 물에서 강자와 붙어라'
허진우 | 2014.09.03 12:37



[스포츠타임스=허진우 기자]“항상 나를 뛰어넘는 후배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 테니스가 세계와 경쟁할 때 말이다.”

미국 뉴욕 플러싱 빌리진 킹 국립테니스코트에서는 테니스 메이저대회 US오픈이 한창이다. 하지만 그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는 없다. 정현(18)과 장수정(19)이 도전했지만 예선 탈락하며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 아쉬움보다 첫 도전이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US오픈 16강에 오른 이형택(38) 역시 후배들의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그는 “지더라도 큰 무대에서 세계 강자들과 자꾸 싸워봐야 한다. 경험과 자신감이 쌓이면 경쟁력도 생긴다. 어린 선수들이기에 세계 정상권을 노릴 시간은 충분하다”고 응원했다.

이형택도 선배인 박성희(96년 프랑스오픈, 97년·98년 호주오픈 복식 16강)의 “작은 대회에서 이기는 것보다 큰 무대에서 지는 게 더 많이 배운다”는 조언대로 세계에 맞서며 성장했다. 때로는 이기기도, 때로는 지기도 하면서 성장 토대를 만들었다.

일본 선수를 뛰어넘어 세계로

이형택은 국제대회에 나설 때 일본 선수를 뛰어넘는 것이 목표로 삼았다. 그는 90년대 일본 남자 테니스계의 영웅으로 불린 마쓰오카 슈조. 이형택은 대회 때마다 그보다 높은 성적을 거두겠다는 각오로 뛰었다.

이루기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US오픈에서는 마쓰오카를 밀어냈지만 윔블던에서는 마쓰오카(8강)를 넘지 못했다. 세계랭킹은 마쓰오카(최고 46위)를 제쳤다. 이형택은 “각종 대회에서 마쓰오카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 성적 이상을 내기 위해 더욱 집중하곤 했다. 아쉬운 건 이후 일본은 마쓰오카에 준하는 선수들이 나온 반면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최근에는 중국 여자 선수들이 성적을 내고 있다. 한국 선수들도 세기와 경험을 생기면 충분히 세계에서 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발 한발 전진하며 이형택은 한국 남자 테니스의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2007년 달성한 세계랭킹 36위는 한국 남자 테니스 역대 최고 랭킹. 한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4대 메이저대회에서 모두 승리했고, US오픈에서는 2차례 16강(2000년·2007년)에 올랐다. ATP 투어대회에서도 단식(2003년 아디다스 인터내셔널)과 복식(2003년 시벨오픈)에서 정상에 올랐다.

국제테니스연맹(ITF)이 주최하는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 본선에서 승리(2008년 독일전)도 따냈다. ATP투어대회 통산 161승164패. 데이비스컵에서도 통산 51승23패(단식 41승9패, 복식 10승14패)를 기록하며 국제테니스연맹이 주는 공로상을 받았다. 투어대회 시드(2001년 미국 세인트주드대회)를 받았고, 초청료를 받고 대회에 참가(2003년 독일 게리웨버오픈)하기도 했다. 모두 한국 선수 최초의 기록이다. 서킷대회나 퓨처스대회, 챌린저대회의 우승 기록은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이형택은 “내 이름이 지워지는 날이 오길 바란다”라고 말한다. 그는 “ATP투어대회 등 국제대회에 나가면 연도별로 참가 선수와 성적이 게재된다. 후배들이 나보다 뛰어난 성적을 거둬 그들의 이름이 더 알려졌으면 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큰 물에서 싸워야 더 빨리 큰다

마이클 창(89년 프랑스오픈 우승), 앤디 로딕(2003년 US오픈 우승), 앤디 머레이(2013년 윔블던 우승), 마라트 사핀(2000년 US오픈, 2002년 데이비스컵, 2005년 호주오픈 우승), 카를로스 모야(98년 프랑스오픈, 2004년 데이비스컵 우승) 등 세계 랭킹 1위에 올랐거나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했던 선수들도 이형택에게 패배의 아픔을 맛봤다. 이형택은 “그들을 이기면서 나도 세계에서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내가 이겼던 선수들이 투어대회 우승하거나 세계랭킹이 높아지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했다.

라파엘 나달, 로저 페더러, 안드레 애거시, 피트 샘프라스 등은 이겨보지 못했다. 그래도 많은 것을 배웠다. 경기 운영이나 경기 중 움직임, 최고 선수와 겨룬 경험은 성장을 도왔다. 특히 2000년 샘프라스와의 US오픈 16강전 이후 누구와 붙어도 긴장되지 않았다. 이형택은 “당시 샘프라스는 세계 최고 선수였다. 테니스 잡지에서나 보던 선수와 겨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 경기도 못 이기면 창피할 것같아 전날 잠을 못 잤다. 첫 경기를 잡고는 긴장이 풀렸지만 첫 세트를 타이브레이크로 내준 뒤 우천 중지로 컨디션을 유지 못하면서 완패했다. 아쉬웠다. 그 경기 이후 경기 전날 잠을 못자는 일은 없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박태환도 후원이 없는데

인천아시안게임에서 한국 테니스의 메달 전망을 그리 밝지 않다. 이형택은 “아시안게임에서 선수들을 믿어야 한다. 노메달일수도 있다. 그래도 못했다고 비난할 수 없다. 그동안 선수를 육성하는 데 투자가 적었다. 박태환이나 김연아처럼 갑자기 천재가 나오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다. 기업후원 대회들이 줄면서 선수들의 경험이 부족하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박태환조차 후원을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솔직히 박태환같은 선수가 후원이 없다는 건 일본이나 미국, 유럽 등 스포츠 선진국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잘하기 전부터 관심을 두고 육성에 힘써야 하는데 한국은 성적이 나야 그제서야 관심을 보인다. 투자로 경쟁력을 키워야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형택은 답답한 현실을 이겨나가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2009년 이형택테니스아카데미재단을 설립해 유망주 육성에 집중하고 있다. 유망주들을 선발해 장학금을 주며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전국 주니어테니스대회를 열었고, 지난 8월에는 ITF이형택재단 국제남자 퓨처스테니스 대회도 치러냈다. 어려움도 많다. 정부 지정 기부금단체가 됐지만 모금활동이 쉽지 않다. 그래도 묵묵히 전진하고 있다.

이형택은 “한국 테니스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대회에 나가보면 안면없는 젊은 선수가 반갑게 인사할 때가 있다. 과거 내가 뛴 경기 볼보이였다며 그때 나를 보고 테니스 선수 꿈을 키웠다고 하더라. 반가운 한편으론 우리 후배들도 세계 랭커들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더라”라고 했다.

그래서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대회가 늘어났으면 한다. 후배들이 홈그라운드 이점을 가지고 자신있게 경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형택은 세계 랭커들이 참가하는 투어대회 유치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일찍부터 국제대회를 경험하는 게 좋다. 낯선 환경과 낯선 선수에 대한 부담은 경험할수록 준다. 과거 외국 선수를 보면 모두 나보다 더 잘할 것같은 생각에 주눅들곤 했다. 지더라도 맞붙어본 선수를 다시 만나면 심리적으로 도움이 된다. 그럼 제 실력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형택은 아직 현역이다. 2009년 은퇴했다 올해 복귀했다. 테니스에 대한 욕심과 열망이 그를 다시 코트로 불렀다. 이형택은 “복식 세계랭킹 10위권 안에 마흔이 넘은 선수가 활약하는 것도 봤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시 도전하려 한다. 아직 힘이 있을 때 후배들과 경쟁하며 땀흘리고 싶다”고 했다.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이형택이 스스로에, 한국 테니스에 던지는 화두다.

글·사진=허진우 기자 zzzmaster@thesportstimes.co.kr

허진우  zzzmaster@thesportstimes.co.kr

<저작권자 © 스포츠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허진우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